[자목] 감정의 기원起原




  무라사키바라는 언제나 이른 오후에 병실을 찾아왔다. 

  처음엔 예고없이 제 키보다 작은 문을 열고 고개를 숙여 들어오는 모습에 놀라 멍하니 올려다보고만 있던 키요시에게 먹고 있던 과자 봉지를 내밀었다. 먹을래? 그것을 얼결에 받아들고나서야 키요시는 입을 열었다. 무라사키바라? 그랬더니 손에 든 쇼핑백에서 감자칩을 꺼내든 무라사키바라가 대답했다. 응. 이름 안 까먹었네. 키요시는 그 말에 허망해져 중얼거렸다. 잊을 리가 없잖아.
  뭐, 나도 이번엔 기억하고 있지만. 키요시 텟페이. 자신보다 어린 타학교의 후배에게 이름을 불리고도 조금 기뻤다. 세이린과 요센이 연습시합을 했는데 제가 없어서 쿠로코에게 물었다는 모양이었다. 무라사키바라는 그 뒤로 이따금 도쿄에 올 때마다 키요시의 병실에 들르게 되었다.

  연습은 괜찮냐고 물으니 내일은 어차피 더 굴릴 게 뻔하니까 땡땡이 치고 왔어, 라고 대답한다. 키요시는 다리를 높은 베개 위에 올려놓으며 그렇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았다. 다리가 낫지 않는 이상, 키요시는 어쩌면 연습은 커녕 평생 코트 위에서 달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몰랐다. 키요시는 그런 생각을 텁텁한 입안으로 오렌지 주스와 함께 꿀꺽 삼켰다. 오늘은 웬일인지 무라사키바라의 손에 달지 않은 주스병들이 들려 있었다. 단 것만 찾는 그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들이다. 키요시가 물끄러미 그것들과 무라사키바라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니 커다란 손이 불퉁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시트 위에 내려놓았다. 오렌지, 알로에, 토마토. 그가 구박하던 키요시의 나이답지 않은 취향이다. 무로칭이, 병문안 갈 땐 그런 거 사가야 된다고 그랬어. 꼭 할아버지 같은 것들. 쉴 새 없이 과자를 들고 씹던 손가락이 키요시를 가리킨다. 꼭 키요시 같은 거. 그 행동을 무례하다고 해야 할지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키요시는 그 경계를 모호하게 웃어넘겼다. 무라사키바라는 꼭 지난번에 흑사탕맛 마이우봉을 먹었을 때 지었던 표정을 지었다.
  요센은, 어때. 그가 찾아올 때마다 키요시가 꺼낼 이야기는 농구에 관련된 얘기밖에 없었다.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화제가 그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 다 별로 원하는 화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키요시는 결국 묻고 만다. 뭐야. 지금 염탐? 뭐, 그래봤자 질 생각은 없지만. 무라사키바라가 새 과자봉지를 뜯으며 말을 받는다. 바보들이 연습에 얼마나 열 올리는지, 여름도 아닌데 더워 죽겠다니까. 당신이랑 싸우고 난 다음부터 그래. 짜증나. 체구에 맞지 않는 조그만 병원용 의자에 앉아 투덜거리는 것이 귀엽다. 키요시는 문득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두었다.
  시덥지 않은 질문, 마찬가지로 시덥지 않은 대답. 열어놓은 창 너머로 바람이 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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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중~



초코가 코팅된 부분을 먹고 있었나보다. 달았다.


by 메이데이 | 2013/06/08 00:09 | 트랙백 | 덧글(0)

告解

 

 

잊을 수 없던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나요.

 


그렇게 말하는 타카야의 안색이 새벽처럼 파리해져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시선을 보면서 나는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는 타카야의 시선은 아직도 그날 그때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죽은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있었다. 뺨으로 다가오는 손을 왜 피하지 않았는지, 나는 모른다. 까칠해진, 그러나 보기보다 따스한 그 손안에 있는 그 무엇이 나를 동하게 한 건지도. 그 뭉툭해진 손끝으로 내 볼을 쓰다듬는 그 손길에, 무엇하나 따스함이 있었는가.

 

울지 말아요. 난 당신을, 안아줄 수 없어요.

 


당신과, 끝까지 함께 가줄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타카야의 음성이 여느 때보다도 여리고 차가웠다. 그 말이 마치 내겐 사형선고를 내리는 간수의 음성 같았다. 한살 연하의 어린 포수, 그 자그만 웃음 섞인 얼굴에 묻어나오던 따스함. 이제, 나는 당신에게 지쳤어요, 질렸어요,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세요.

 


어째서일까, 정작 그 순간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몇번이나 난도질하며 죽여내던 타카야의 살인(殺人)이었는데도, 나는 눈물은 커녕 그 흔한 화도 낼 수 없었다. 타카야의 가슴에는 내가 수십번이나 난자하며 긁어냈던 자상이, 길게 남아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몇번의 살인을 저질렀는지 아나요, 그 수십번의 살인에서 나는 몇번이나 당신을 용서했는지 아나요, 그래서, 내가 몇번의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았는지 아나요, 아니면

 

 

당신은, 내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했는지, 알고 있나요.

 

 

나는 그 무엇보다도,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아아, 그랬던 거구나

 

너는 나를,

누구보다도

증오하면서

사랑했던 거구나

 

견딜 수 없는 고독을 삼키는 입이 썼다. 신앙과도 같은 이 고독을 견뎌내면서 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죽음보다 더한 저 말을 내게 내리면서 너는 얼마나 울음을 속으로 삼켜냈을까. 도와주세요, 라는 말을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겨우 견뎌내고 견뎌내어 마음이 다 헤질 때까지 숨겨두었을 너를 이제서야 깨달아버린 나에게

 

 

부디 죽음을 내려줘

by 메이데이 | 2012/10/08 19:23 | 트랙백 | 덧글(0)

激痛

 

 

 

 

 


"너.. 그러다 내 왼쪽 어깨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그 날, 처음으로 움켜잡았던 당신의 멱살을 놓으며 나는 다짐했다. 당신의 포수였던 나는 이제 당신의 공을 받지 않겠다고.

 


매일매일 온 몸에 멍이 들어가면서도 가끔 듣는 칭찬같지 않은 온기가 스며드는 것이 좋아서 그의 공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니까. 설령 그런 이유만으로 내가 그의 배터리가 됐다고 해도 그것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끈적하게 내려 앉은 공기 사이로 사람들이 발걸음을 교차시켜 갔다. 녹색불이 깜박이는 신호 사이에, 아베 타카야는 서 있었다. 저려 오는 어깨를 세게 움켜쥐고 소란스러운 인해 속에서 가만히 서서 사람들이 지나쳐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려 왔다. 묘한 경련이 목 근처에서 일어나서 손가락으로 누르며 회색으로 물든 도시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인산인해라고 했던가. 산을 이루고 바다를 만들 수 있을만큼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왜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거야. 어째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점점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빗방울과, 대화소리와, 심장소리들 사이에서도 멈춰지지 않았다. 그의 소리는 섞이지 않는다. 귀를 막았다. 그가 그냥 지나가주길 바랬다. 그러던 그 때,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치고 지나갔기 때문에 아베는 아픈 어깨를 잡느라 우산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아베를 발견한 그가 이름을 불렀다.
 

 "타카야. 너.." 물결에 잔잔히 파문이 일듯이 그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번져갔다. 아베는 도망쳤다.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도망이었다. 하루나 모토키라는 사람에게서 도망쳤다. 그가 부르는 나의 이름이 이렇게 원망스러웠던 적은 처음이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결국 이렇게 패배견 같은 모습으로 도망치는 꼴이라니, 웃기지도 않아서 눈물이 난다. "야! 너 거기 안 서?! 타카야! 너 잡히면 죽여버린다!" 뒤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한 마디에, 아베는 정신이 들었다. 뒤에서 쫓아오던 하루나가 그 옆에 멈춰섰다. 하루나는 아베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온 몸의 관절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야! 너 죽고 싶어? 왜 도망 가?" 여전히 변하지 않은 과격한 성격에 아베는 웃어버렸다. 포기한 채로 몸이 흔들거려지는 채.  "안 변했네요.." 하루나는 아베의 그 말에 잡고 있던 멱살을 풀어버렸다. "너 이상하다. 전에 도망 갔을 때는 당당하더니 오늘은 왜 그래?" 전이라니.. 그 땐 단체행동 중이었다고 말했잖아요. 아베는 그렇게 말하며 옷을 털고 일어섰다.

"안 변한 게.. 화 나요."

하루나는 움찔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아베가 감정을 표현한 것은 그 때 이후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진 것이 너무나도 분해서 혼자 울며 자신에게 달려들었던 때.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나빠졌다. 타카야 주제에 자신에게 그딴 말을 하는 게. "그래서? 화 나면 어쩔건데?" 아베는 하루나보다 한 뼘은 작은 체구로 하루나를 올려다봤다. 안타깝고 서럽고 울 것만 같은 기운이 서려 있어서 하루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베가 말했다. "내가..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에게 뭘 어쩌겠어요?" 저만치 떨어진 하루나의 우산을 주워들어 아베가 하루나에게 건네 주었다. 하루나는 그것을 받아들며 아베를 노려봤다.

  "너.. 그렇게 부르지마."

아베가 슬핏 웃었다.

 "어떻게요?"

 "당신이라고 부르지 마."

하루나가 으득, 하며 이빨을 갈았다. 아베는 표정 없이 답했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하루나 씨? 하루나 선배?" 하루나가 아베의 어깨를 잡았다. 힘이 실려 있는 손길이라서 아베는 하루나를 쳐다보았다. 하루나가 아베의 눈빛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했던 것은, 건방질 정도로 곧고 또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이제서야 다시 떠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예전처럼.. 모토키라고,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면 되잖아. 뒤에 수식어는 알아서 붙이고." 그 말을 듣고 아베가 웃었다.

 "예전처럼.. 이라고요? 우리가... 아니 당신과 내가 아직까지도 배터리라고 생각해요?"

삐걱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녹슨 철 냄새가 나는 전봇대 아래, 어느새 불이 켜진 전등빛이 빗물에 흐려져 있었다. 하루나도 아베도 그 밑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까 아베의 어깨를 잡아 세워 떨어뜨린 우산의 오목한 곳에 비가 떨어져 가득 차 있었다. 먼저 아베가 입을 열었다. "다시는 내가 당신을 이름으로 부를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이에요. 그런 게 당연한 거죠?" 하루나가 전등빛을 받아 옅은 오렌지빛으로 보이는 아베의 눈동자를 보고, 저기 떨어져 빗물을 받는 신세가 된 우산을 보고, 자신의 손을 보고, 그리고 말했다.

 "너.. 날 좋아하지? 그래서 질투했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는 거고?" 아베는 솔직히 그 말에 동조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사실로 받아들이는 자신도, 저런 소리를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려는 그도 싫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난 고개를 젓는 투수 같은 건, 싫습니다."

하루나는 그 말에 눈에 띄게 성난 표정을 하고 아베의 어깨를 잡아 벽에 밀어 붙였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웃기지 마..... 그렇다면 그런 표정은 뭐냔 말야. 왜 나를 볼 때 그렇게 울 것 같은 눈동자로 보는 거야!!!" 아베는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하루나를 보면 볼수록 현기증이 일 것만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화나면 더욱 낮아진다는 사실마저 기억해내는 뇌를 긁어내고 싶었다.


 "그러다, 제 어깨가 망가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뭐?"
 "투수가 아닌 포수라도 어깨가 망가지면 야구는 하기 힘들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당신만 보면 어깨가 아파 와서, 당신만 보면 야구를 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당신이 싫다. 왼쪽 어깨에 격통이 몰려왔다. 비 오는 날, 당신을 보는 날, 당신의 낮은 목소리를 기억하게 되는 날이면 아파. 싫어. 그 날 이후로 당신의 공을 받았던 건 당신의 포수였던 내가 아냐. 당신의 포수였던 아베 타카야는 그 날로 없다. 그러니까 나의 야구를 향한 감정, 대단한 당신을 동경했던 아베 타카야마저 흔들지 마...! 

 "너.. 아직도 그 일로 그러는 거냐?" 하루나는 맥이 풀린 소리로 웅얼거렸다. 아베가 말했다.
 "설마요. 그냥 장난인데요. 그쪽이야말로 못 잊은 거 아니에요?" 아베가 어깨에 걸쳤다가 내려간 가방을 다시 어깨에 맸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목이 메어와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목을 찢을 것만 같은 손을 애써 주먹 쥐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하루나 모토키."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뒤돈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중학 시절에 내가 당신을 동경하고 존경하고 좋아했던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당신은 야비해. 비겁해. 날.. 날 단순히 공 받는 포수로만 여겼던 게 너무 분해. 그렇게 걸어간 앞으로, 당신은 뒤쫓아 오지 않았다.

아베는 입술로 내려오는 짠 맛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녹슨 철의 냄새, 그 맛은 익숙했다. 격통이 이는 어깨를 꼿꼿이 세우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모토키 씨."
그 이름을 불러도 들을 이는 이미 없었다. 아베는 뒤돌아 보지 않고 걸어갔다.



by 메이데이 | 2012/10/08 19:21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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